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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백장 글쓰기

[100-29] 간장병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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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볶음을 하는 중이었다.
살짝 몸을 틀면서 며칠 전 사 둔 크랜베리를 가지러 가다가
간장병을 떨어뜨렸다.
검은 빛 간장이 바닥에 삐죽삐죽한 지도를 그리며 
콸콸거리고 있을 때 
'으악' 비명소리를 지르며 간장병을 바로 세웠다.
 
무슨 일이냐며 아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먼저 달려왔고
별 일 아니라고 안심시키며 휴지로 간장부터 닦아냈다.
 
인생의 계획 속에도 뜻하지 않은 간장병 투하가 존재한다.
극복하기 힘든 일도 있겠지만
별 일 아니라고 그냥 치우고 지나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5년 전 쯤에 자궁근종이 갑자기 자라서 하혈이 심했었다
하이푸시술도 해 보았지만
결국은 복강경으로 자궁을 적출해 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수술한 후에는 하혈이라는 단어에서 해방되려니 했는데
미량의 하혈이 몇 달 째 그치지 않았다.
수술실이 녹지 않는 체질이라 시일이 걸린다는 말과
어떤 이는 2년 정도 걸리기도 한다며 병원에서는 쉽게 이야기했다.
미심쩍어서 다른 병원을 찾아가 보니
수술 부위가 잘 아물지 않고 있다면서
그냥 잊고 지내면 서서히 치유될 거라고도 했다.
 
처음 두세 달 동안은 별별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수술하면서 거즈를 다 꺼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다른 병이 생긴 건 아닌지 등등
온통 하혈에 집중되어 있었다.
100일이 지날 즈음에는 언젠가는 멎겠지라며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거짓말처럼 2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니 말짱해졌다.
 
질병이라는 부분에서는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시간이라는 약을 처방받아야 할 때도 있다.
 
널브러진 간장들을 닦아내며
다른 잡다한 생각들과 연관 짓지 않는 것이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잘 해결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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